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단 편집) ==== 1차 필리핀 전역 ==== || [[파일:BjNSb2aIUAEAGF2.jpg|width=100%]] || 1935년 10월, 맥아더는 필리핀 연방정부의 군사 고문 겸 원수에 취임했다. 그후 그는 훈련 캠프가 거의 건설되지 않고 장부상에 병역 대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군대에 없는 이들이 수두룩하고 장비와 무기는 형편없고 예산은 엉뚱한 곳에 쓰이는 등 온갖 문제점이 산적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맥아더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노력했고 정부에 무기 및 PT 보트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미 정부도 [[세계 대공황]] 때문에 국방비를 감축하는 상황이라 맥아더에게 최신식 무기나 PT 보트를 지원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정부는 [[드럼 요새]] 등 중장갑 요새 시설이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답을 보냈고 맥아더는 이에 상당히 분노했다. 하지만 1941년 무렵 미국은 필리핀에 상당한 지원을 해줬다. 필리핀 수비군은 1941년 7월에서 12월까지 8500명을 증원받았으며 많은 장비들을 선적했다. 또한 11월까지 110만 톤에 달하는 장비가 미국 항구와 창고에서 필리핀으로 운송해줄 선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 휘하 병력도 상당했다. 1941년 12월 당시 보병 병력은 필리핀 병사 12만, 미군 병사 1만 9천 명으로 종합 13만 명이었고 전차는 108대였고 전투기 및 폭격기는 B-17 폭격기 35대, P-40 전투기 107대 등 총 249대(전투기는 175대, 폭격기는 74대)였다. 반면 필리핀을 침략한 일본군 전력은 제 14군 소속 12만여 명이었고 탱크는 90대였으며 전투기 및 폭격기는 총 541대였다. 그나마도 전투 후반인 1942년 2월 무렵엔 다수의 병력이 동인도 방면으로 이동하고 제65여단이 단독으로 바탄을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맥아더는 이 시기에 실책을 연이어 범했다. 우선 방어 전략을 잘못 정했다. 미국의 초기 필리핀 방어 계획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마닐라만의 바탄 반도로 후퇴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필리핀 전역의 해안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B-17 폭격기를 사용하여 섬에 접근하는 일본 선박을 침몰시키는 계획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필리핀의 해안은 15만 군대로 커버하기엔 너무 길었기 때문에 방비가 소홀해진 곳이 많았고, 일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여 내륙에 진입했을 때 이를 저지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맥아더는 일본군이 성공적으로 상륙해 내륙으로 진격해오는 상황에서도 이틀 동안 아무런 지령도 내리지 않다가 뒤늦게 해안 지대에 배치된 병력을 바탄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해안 지대에 주둔한 15만 병력 중 7만명 만이 바탄에 철수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물자들은 해안지대에 남겨져서 바탄에 남아있는 물자는 매우 부족했다. 또한 그는 일본의 예상되는 침략에 대항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Station CAST라고 알려진 섬의 해군 요격 기지에는 일본의 외교 소식을 해독하는 일급 비밀 암호 시스템과 최신 JN-25 해군 코드의 코드북이 있었다. 맥아더의 부관 리처드 서덜랜드는 이 Station CAST에서 해독한 정보를 맥아더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8일 03시 30분, 서덜랜드는 진주만 공습 소식을 맥아더에게 알렸다. 그리고 05시 30분, 미국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맥아더에게 기존의 전쟁 계획인 레인보우 파이브를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맥아더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극동 공군 사령관 루이스 H. 브레톤은 3차레에 걸쳐 전쟁 전에 정해진 대로 대만의 일본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지만 서덜랜드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브레톤은 맥아더에게 가서 11시전까지 대화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했고, 맥아더는 아예 브레톤과 대화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진주만 공습 9시간 후인 12시 30분, 일본 제11항공 함대 소속 폭격기가 이바 필드에서 클라크 필드와 근처 전투기 기지를 공습했다. 그 결과 35대의 B-17 폭격기 중 18대가 파괴되고 107대의 P-40 전투기 중 53대가 파괴되었으며, 3대의 P-35 전투기와 25대의 다른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거기에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150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극동 공군의 남은 전투기들도 며칠만에 모두 파괴되었다. 반면 일본 항공기의 손실은 겨우 7대였다. 만약 맥아더가 제때에 '레인보우 파이브'를 시행하고 브레톤의 요청대로 대만의 일본 기지를 공격하게 해줬다면 이러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현장에 가서 병사들을 독려하긴 커녕 몇몇 인사들과 함께 말란타 터널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병사들에게 전황을 타개할 이렇다할 작전도 제대로 지시하지 않았다. 이에 병사들은 그를 "참호속의 더그(Dugout Doug)"라고 조롱했다. 지휘관이 이렇듯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서도 바탄 현지 미군 장교들은 최선을 다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일본군은 20사단의 3개 대대가 궤멸되는 등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그리고 1942년 2월 무렵엔 일본군 제65여단 7천명이 미군-필리핀 연합군 7만명이 지키는 바탄을 포위 공격하는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상식적으로 보면 미군-필리핀 연합군이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급품들을 해안지대에 내팽개친데다 7만명에 달하는 피난민까지 먹여 살리는 바람에 물자가 완전히 소진되어서 연합군의 전투력 자체가 소멸되었다. 게다가 공군이 너무 허무하게 궤멸되는 바람에 일본의 공습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맥아더는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코레히도르 섬의 터널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가 루즈벨트의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자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가족과 전속부관 등 소수의 인원만 대동한 채 미 해군 어뢰정 2척을 타고 심야에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했다. 실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했던 용감한 참모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졸렬한 행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